이것은 금이다, 2022

싱글 채널 HD 비디오, 컬러, 사운드, 10분 48초.

THIS IS GOLD 01 THIS IS GOLD 02

2022년 여름,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작은 돌 하나를 주워왔다.

당시 나는 크립토 선물 거래와 NFT 거래에 빠져 반 년 가까이 해외 거래소와 오픈씨의 차트만 들여다보며 살고 있었고, 수중에 있던 몇백만 원을 잃어 죽고만 싶었다. 숨통 좀 트고 싶어 오르기 시작한 천안의 광덕산 산자락 능성이를 저벅저벅 올랐다.

산 공기와 수풀 냄새, 작은 다람쥐들을 보며 마음을 달래보자 했지만, 바람과는 달리 관성적으로 눈에 묻은 차트의 잔상들이 산길에 겹치고 산 위에 겹치고, 나뭇가지와 줄기들은 양봉과 음봉으로 보였다. (산 밑 계곡물에서는 똥 냄새도 났다.)

계곡 밑으로 내려가 물수제비를 던지고 반질반질한 돌멩이를 찾아 양손, 양발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계곡물 갈대 사이를 뒤적거렸다. (어디 금덩이라도 없나—19세기 미국의 골드러시 관련 사진을 볼 때마다 물에 발을 담그고 사금을 채취하는 장면들이 어른거렸다—있을 리가.)

계곡을 끼고 한참을 돌아다니다 한 손에 꽉 차는 크기의 돌을 주웠다. 흙이 묻어서 그런지 살짝 금빛이 돌기도 했다. 금덩이가 이 정도 크기가 되면 얼마 정도 하려나 싶고, 수중에 돈이 생기면 얼마를 떼어 어떻게 사용하고 저축을 할지, 적금을 얼마 들고 월세와 보증금, 엄마 아빠에게 초밥을 사드릴 수 있겠구나. (오마카세. 아마 선물 거래하며 잃은 돈으로만 가족끼리 15번은 다녀왔을 수 있겠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가방에 돌을 넣고 버스에 올라 집까지 돌아오는 길이 꽤나 멀게 느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에 돌아와 돌을 수돗물에 쓱쓱 씻고 햇볕에 말리는데, 엄마가 대체 저 돌은 왜 주워왔냐고 하도 잔소리를 해대서 “어머니, 육신은 지수화풍(地水火風) 네 가지 인연을 따라 모인 것이라 이 돌이나 나나 결국 연기적 존재이고, 조주선사는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돌을 무시하면 안 된답니다.” 라고 하자 등짝을 얻어맞고 (엄마는 교회 집사다) 밥이나 먹으라고 해서 방으로 돌아와 헤어드라이어로 돌을 말렸다.

다 말린 돌을 그 당시 나온 3D 스캐닝 어플로 찍어 휴대폰에 넣고, 손가락을 이리저리 굴리며 스크린에 비춰진 돌도 돌도 아닌 것의 물성을 살살 느껴보려 애썼다. 미래에 어떤 종류의 기술이 여차저차 이러쿵저러쿵 발전한다면 진짜 돌을 금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도 기술을 갖춘 시대가 되면 돌을 금으로만 바꿀 게 아니라 밥으로 바꾸고 (금을 빵으로 바꿔 먹어도 괜찮을 사회가 오려나) 똥을 밥으로 바꿀 수도 있겠지. 근데 그런 세상은 더 나은 세상일까?

‘미디어의 이해’에서 맥루헌은 기술(컴퓨터)은 오순절 강림과 같은 ‘통일’적 조건이 담지된 세상을 인간에게 약속해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에 ‘논리적인 순서대로라면’이라는 조건을 붙이는데, 이는 기술이 가져다줄 미래에 대해 예측할 수 없다는 전제를 두고 있다. 기술 낙관주의자들은 늘상 ‘더 나은 기술’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 예언한다. 논리적으로는 그럴 듯하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더 빠르고 정교한 기술이 인간의 결핍을 메우고, 세계의 균열을 메꿔줄 거라고. 한때는 그 믿음이 신앙과 비슷한 결을 가진다는 걸 몰랐다. 차트를 들여다보는 행위, 그래프가 오르내릴 때마다 함께 숨을 고르고 내쉬는 행위, 그것은 기도의 리듬과 닮아 있었다. 다만 내가 응시하던 건 성상이 아니라, 픽셀로 이루어진 불빛들이었다. 그 빛을 데이터라 부르며, 그것이 세상의 진짜 구조라고 착각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 믿음은 황금과도 닮았다. 눈부시지만 잡히지 않는, 닿는 순간 증발하는 신기루 같은 물질. 사람들은 그것을 기회라고 부르고, 나는 그것을 구원이라 불렀다. 돌멩이를 주워 들던 그날 이후, 나는 종종 생각했다. 금이란 건 어쩌면 물질이 아니라 언어일지도 모른다고. 어떤 언어는 돌을 금으로 만들고, 어떤 언어는 금을 쓰레기로 만든다. 기술이 그 언어를 대체하는 시대라면, 결국 인간은 믿음의 형식을 잃고 기호의 파편에 의지하게 되는 걸까.

나는 여전히 돌을 쥐고 있다. 손바닥에 남은 그 돌의 무게는 0.3kg 정도지만, 화면 속에서 그것은 무한히 가볍다. 화면에서 돌은 그림자도 없고 냄새도 없으며, 물의 차가움도 없다. 대신 반짝인다. 빛을 잘 받기 때문이다. 빛은 모든 걸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하지만 나는 점점 그 황금빛이 무섭다. 그건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때로 3D로 스캔된 돌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것을 손에서 놓는다. 기술이 약속한 ‘더 나은 미래’라는 말을 떠올리며, 그것이 정말 미래일까, 혹은 또 다른 믿음의 시뮬라크르일까 생각한다. 돌을 금으로 바꿀 수 있다면, 우리는 결국 신을 다시 발명한 셈이 아닐까.

(작업노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