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 채널 비디오, 2700 × 2160, 흑백, 사운드, 5분 50초.
(본 작업은 박건희문화재단, 캐논코리아, 스위스 정부초청 장학금의 지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1.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아주 어릴 적 본 애니 중에, 눈을 감고, 그 눈을 감은 상태로 한번 더 눈을 감으면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다는 내용의 애니를 본 적이 있다. 사실 지루하다고 느껴 뒤의 내용을 더 보지는 않았지만 그 대사 하나는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2.
어느 다큐에서 지구에 ‘눈’이라는 기관이 처음 발생한 시기가 대략 5억 4천만년 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전에 생명체들은 그냥 입을 벌리고 물 속을 부유하며 떠다녔고, 무언가가 입 속에 들어오면 삼켜서 생명을 보전했고, 무언가의 입 속에 들어가면 죽는 것이었다고 한다.
3.
또 언제였나 어릴 적 본 사자성어 만화 중에 우물 속의 두부를 한나절 동안 초집중해서 바라보고 그것을 손을 대지 않고 꺼내는 일화를 본 것이 기억난다. 대강 “마음을 다해서 뭔가에 집중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식의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표현한, 그런 류의 내용이었겠다. 덕분에 나는 냉장고에 있던 두부를 꺼내 접시에 올려놓고 방에 들어와 두부를 바라보며 온 정신을 쏟았고 결국 멀쩡한 두부 몇 모를 버려야 했다. (두부는 공중에 떠오르지 않았다.)
4.
어릴 적 형과 했던 가장 재미있는 놀이는 ‘염력 싸움’이었다. 나와 형은 ‘룬의 아이들’을 시작으로 판타지 소설에 타고타고 올라가 어느 순간 무협지에 빠져서 서로에게 장풍을 쏘고 공중 부양을 하고 시골에서 줏어온 대나무 막대를 들고 전주 평화동 미송하이존 아파트 단지를 무릉도원처럼 누볐다.
5.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인다고 상상하는 것,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믿는 것. 둘 다 결국 하나의 상을 짓는 일이다.
눈으로 들어온 빛이 망막 위에 맺어 만드는 것은 상(像)이다. 像은 사람 인(亻)과 코끼리 상(象)이 붙은 글자다. 글자의 구조만 놓고 보면 사람은 뜻을, 코끼리는 소리를 맡지만, 象은 소리만 빌려준 것이 아니다. 像이 생기기 전부터 象은 이미 코끼리이면서 모양이었고, 닮은 형상이자 어떤 것을 대신해 드러내는 표상이었다. 像은 그 오래된 象의 한쪽 의미를 물려받아 따로 떨어져 나온 글자에 가깝다. 이미지의 안쪽에 코끼리가 우연히 끼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아직 코끼리였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象은 정말 코끼리를 옆에서 본 모양을 그린 상형문자다. ‘한비자(韓非子)’에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코끼리를 좀처럼 보지 못해서 죽은 코끼리의 뼈를 보고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짐작했고, 그렇게 보지 못한 실물을 마음속으로 그려내는 것까지 象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이것을 실제 어원으로 보기는 어렵겠지만, 이야기는 얼추 잘 맞는다. 사람들은 코끼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코끼리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미지의 시작에는 보았던 코끼리가 아니라 보지 못한 코끼리가 있다.
6.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전서 2:9, 개역한글)
7.
狀도 형상 상이다. 形狀의 狀은 무언가를 닮게 옮겨 놓은 이미지라기보다, 사물이 지금 실제로 하고 있는 꼴, 그러니까 상태에 가깝다. 像이 원본을 흉내 낸 닮음이라면, 狀은 사물 그 자체가 어떻게 놓여 있는지를 말한다. 狀은 개 견(犬)에 소리를 맡은 조각 장(爿)이 붙은 글자다. 나무를 세로로 쪼갠 반쪽이라고도 하고, 침상을 세워 그린 모양이라고도 한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의견이 갈리는 모양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는 狀을 ‘개의 형상’이라고 풀이했다. 이 오래된 풀이를 그대로 따라가면 像의 안에는 코끼리가 있고 狀의 안에는 개가 있다. 모양과 상태를 말하기 위해 사람은 먼저 동물의 몸을 빌려야 했던 셈이다.
8.
리오타르가 말했듯, 이미지는 우리가 만드는 게 아니라 새어 나오는 것이다. 욕망은 실시간으로 현실에 틈입한다. (음.. 그냥 니네 다 ADHD야.. 라는 말을 구구절절하게 한다.)
9.
상(相)은 나무 목(木)과 눈 목(目)이 붙은 글자다. 나무를 눈으로 살피는 것에서 ‘보다’와 ‘관찰하다’라는 뜻이 나왔고, 다시 눈에 드러난 생김새와 특징을 뜻하게 되었다. 불교에서 상(相)에 집착한다는 것은 눈앞에 드러난 모양과 특징, 거기에 붙인 분별을 독립적이고 고정된 실체처럼 붙드는 일이다. 相은 ‘서로’라는 뜻도 가지지만, 그것이 눈과 나무가 서로 마주 보기 때문은 아니다. 그래도 글자만 바라보고 있으면 자꾸 눈과 나무가 서로를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相 아래에 마음 심(心)을 받치면 생각할 상(想)이 된다. 정확히는 相이 소리를 맡고 心이 뜻을 맡은 글자지만, 상이 마음으로 내려가 생각이 된다는 식으로 읽어보게 된다. 상상(想像)이라는 두 글자를 뜯어보면 그 안에는 나무(木), 눈(目), 마음(心), 사람(亻), 코끼리(象)가 들어 있다.
10.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Et apprehendens manum caeci eduxit eum extra vicum; et exspuens in oculos eius, impositis manibus ei, interrogabat eum: “Vides aliquid?”. Et aspiciens dicebat: “Video homines, quia velut arbores video ambulantes”.)
(마르코 복음서 8:23–24, 가톨릭 성경, 불가타)
11.
어디서 봤더라.. 존 버거였나.. 보는 것voir과 가지는 것avoir과 아는 것savoir은 관계를 가진다.
12.
대학교 시절 ‘힌두교의 이해’ 수업에서 불이일원론(아드바이타) 베단타를 배웠다. 그때 들은 밧줄과 뱀의 비유가 아직도 기억난다. 어스름 속에 놓인 밧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하는 이야기다. 밧줄은 그대로인데, 어느 순간 뱀으로 보이는 것. 밧줄이 비늘을 얻거나 혀를 내미는 것이 아니다. 달라진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 위에 잠깐 포개진 인식뿐이다.
13.
플라이 투 더 스카이의 ‘가슴 아파도’의 가사 속에서 다녀오는 것, 그리는 것은 마음이고, 행복한 건 눈이다.
오늘 하루도 열두번도 더
내 마음이 다녀오네요
그대가 내게 위험하대도
이젠 멈출 수가 없어요
종일 그려도 매일 있을 그리움
어제처럼 다시 남아서
가슴 아파도 나 이렇게 웃어요
내 눈이 행복한 건 처음이니까
삼킨 눈물에 맘이 짓물러가도
그대라면 난 괜찮아요
...
두번 다신 그댈 볼 수 없다면
아무것도 못보게 될텐데
눈을 뜨고도 감은 것처럼
어둠 속을 걷게 될 텐데
안고 싶어요 사랑하고 싶어요
내 품이 닳아 없어지는 날까지
남은 소원을 다 버려도 좋으니
내겐 단 한사람만
오직 이 한 소원만
14.
‘누군가(Someone)’에 따르면 이미지가 ‘뺨 한쪽에 선천적인 핏자국을 묻힌 채 세상에 나온다’면 빛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땀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나온다.
15.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皆是虛妄。若見諸相非相,即見如來。
(금강반야바라밀경 제5 여리실견분 如理實見分, 구마라집 역)